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걸프 전쟁 (문단 편집) == 전쟁사적 의의 == ||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KlH0vOvcmCw)]}}} || || [[히스토리(텔레비전 채널)|히스토리 채널]] 영상 || ||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nop_u8GPWUg)]}}} || || [[토크멘터리 전쟁사]] 영상 || [[현대전]]의 대표적인 예시로, [[F-117|스텔스 공격기]], [[M270 MLRS]], [[패트리어트 미사일]], [[크루즈 미사일]], [[AH-64|AH-64 아파치]] 등 [[미군]]의 하이테크 [[무기]]들이 대중에게 처음 선보여 그 위력을 가감없이 보여준 전쟁으로, 전 과정이 [[텔레비전]]으로 중계되면서 여러 면에서 전세계 [[사람]]들을 [[충격과 공포]]에 몰아넣었다. 특히 공군을 비롯한 공중전력이 현대전에서 얼마나 중요한 전력요소인가를 명확히 보여주기도 했다. 개전한 지 얼마 안 돼서 이라크 군사 핵심시설 박살낸 것도 결국 항공기등의 공중 전력이었다. 때문에 군사학계에서 '''전쟁의 개념을 바꾸어 놓은 전쟁'''으로 평가받으며, 대중에게도 2차대전의 유럽 구릉지대와 태평양, [[베트남 전쟁|월남전]]의 [[정글]] 이후 [[현대전]]의 새로운 무대인 '''[[사막]]에서 싸우는 전쟁'''의 이미지를 만든 첫번째 전쟁이다. 이후 20년 동안 [[모가디슈 전투]][* 이쪽은 이후 [[블랙 호크 다운|영화]]가 크게 성공하면서 이후 제작되는 작품들에 큰 영향을 주었다.], [[9.11 테러]]로 인한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미국-아프간 전쟁]], [[이라크 전쟁]] 등이 줄줄이 터진 덕분에 '[[이슬람]] 문화권'은 한동안 가상의 배경에서 끊임없이 등장하였다. [[소련]]과 [[중국]]은 이 결과를 보고 [[충격과 공포]]에 빠졌다. 불타는 이라크 무기 상당수가 [[소련]] 또는 그것의 중국의 파생형이었기 때문. 특히 T-72가 이번 전쟁에서 에이브람스를 만나 일방적으로 학살을 당했다. 그러나 [[소련]]은 이미 [[소련 해체|체제가 무너지고 있어]] 별 다른 대응을 하기가 어려웠다. 거기에 후세인 정권이 자국산 무기로 민간인을 학살한다는 사례가 대거 보고되면서 사실상 묵인해 버렸고 후세인 제거를 주장했지만 미국이 씹었다. 과거 [[마오쩌둥]]의 교시를 받들어 대규모의 무장한 민병대를 통해서 침략자를 물리친다는 소위 인민의 바다 전략을 고수하던 중국은 1979년 [[중국-베트남 전쟁|베트남과의 전쟁]]에서 사실상 패배한 이후 이후 군의 현대화를 추진하고 있었는데, 걸프전의 결과를 보고 앞으로 전쟁이 나면 숫자가 아무리 많아도 과학 병기에 밀려서 정규전에서는 100% 진다며 군 현대화에 더욱 박차를 가하기 시작한다.[* 다만 이 시기부터 중국의 경제력이 본격적으로 성장. 군사력 투자가 이전보다 수월해진 점도 고려해야 한다. 중소분쟁과 [[중국-베트남 전쟁|중월전쟁]]을 통해 군 현대화의 필요성 자체는 이전부터 인지하고 있었다.] 소련 해체 이후 경제난에 무너지던 [[러시아군]]도 2000년대 들어서 경제가 회복되자 양보다는 질적인 성장으로 방향을 바꾼 모습이다. 하지만 여전히 미군에게 열세라서 러시아군과 중국군은 군사 협력을 하며 미군을 견제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러시아가 2022년 우크라이나를 침공하여 자신들의 군사력을 과시하려 하였으나 우크라이나의 완강한 저항에 막혀 고전하면서 그나마 끌어올리고 있던 군을 한층 더 떨어뜨리는(.....) 삽질을 하며 여전히 미군의 어마어마한 군사적 능력을 따라오기엔 한참이라는 것을 보여주게 되었다. 대륙과 대운하에 너무 의존한 중국은 명나라 때부터 바다로 나가는 것을 금지했으며 그 결과 청나라 시절 서구 열강들에게 아편 전쟁으로 털린 후 시진핑 집권기부터 뒤늦게야 바다로 진출하기 시작했는데 이미 서구열강들은 21세기 지금까지 해양을 완전히 장악한 터라 특히 제 7함대를 주도한 미국에게 고전하는 중이다. 걸프전에 병력까지 파견하던 [[대한민국]]에도 시사하는 바가 컸는데 당시 [[노태우 정부]]는 1989년, 냉전 종식으로 인해 미국 내부에서 점차적으로 늘어나는 국방비 감축 기조로 인한 위기감을 안그래도 느끼고 있었다. 그러다가 걸프전에서 보였던 전황을 보고 처음으로 국방개혁을 시도하기에 이른다.[[http://www.ddanzi.com/ddanziNews/561555604|#]] 미국은 신속대응군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끼게 되었다. [[쿠웨이트]]가 점령당한 근 몇달 간 상대적으로 기동력이 나쁜 해상 수송 부대가 주요 군사 장비를 옮기기까지 [[미군]]은 고작 급히 공수되어 온 [[M551 셰리든]]으로 눈치를 보는 것이 끝이었다. 이라크가 쿠웨이트 점령 후 미군 증원 이전에 사우디로 신속하게 쳐내려왔을 경우 미국은 대단한 곤경에 처했을 것이다. 당장 현지에 전개할 수 있는 2개의 알몸뚱이 경보병사단과 수십 대 수준의 전투기, 항모전단 1~2개 정도로는 이라크군으로부터 사우디아라비아를 방어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했다. [[김정일]]은 허세 겸 내부 자신감 고양을 위해 "당초 계획대로 사우디아라비아에 집결한 미군을 강하게 타격하고 가스관과 송유관을 폭파하는 등 대담한 군사 작전을 폈더라면 이라크가 이겼을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http://www.donga.com/docs/magazine/new_donga/200007/nd2000070060.html|#]] 물론 그렇다고 전쟁 결과가 달라지진 않았겠지만 전후 처리가 그만큼 골치 아파졌을 가능성이 높다. 허나 이는 당시 사우디군이 미군한테 신속기동에 따른 효율성을 보여준 사례를 담고 있다는 것을 무시한 일방적 주장으로 오히려 사우디의 중동 패권이 더 강화되었을 기회라 미국이 전후 골치 아팠을 것으로 생각 해 봐야 할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